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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재심 청구 부결에 대하여

과거 오마이뉴스의 모 기자가 <몸>을 평하며 '글에 드러난 잔인성의 수위가 너무 높은 것이 아닐까 염려' 운운했던 적이 있습니다(관련 포스트). 기자는 환타지, 호러물, 컴퓨터 게임 등에 사람이 악영향을 받아 폭력과 범죄에 무감각해지고 현실에서 모방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염려 혹은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 이름부터 고매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위')가 이번에 내린 '특단의 조치'도 위 기자의 논점과 유사한 맥락으로 내려진 결정일 것입니다.

간윤위는 지난 2006년 12월 18일,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의 세 작품에서 시체를 토막내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단편집을 청소년 유해도서로 선정했고, 서점에 유통되고 있는 서적을 전량 회수하여 비닐 포장을 하고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낙인을 찍어 재배포(실질적으로는 폐기처분)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이 단편집을 출간한 황금가지에서는 2007년 1월 10일에 간윤위에 재심 청구를 하였고, 간윤위는 초고속으로 재심을 검토하여 그로부터 단 이틀 만인 1월 12일에 재심 부결을 통보해왔다고 합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은 제가 소속되어 있는 공포소설 작가 모임인 '메드클럽'에서 선배 작가님이신 이종호 작가님의 진두지휘 하에 지난 2005년 4월부터 계획하여 1년 여를 준비한 끝에 맺은 값진 결실입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의 대중들에게 공포소설이란, 그저 피칠갑을 한 귀신이 창 밖에 거꾸로 매달려 빨간 눈으로 노려보는 식의 싸구려 괴담으로밖에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을 준비한 의도는 바로 그런 편견들을 불식시키기 위한 메드클럽의 자구책이었습니다.

제가 낯선 이와 만나 직업을 작가라 소개하면 상대는 대뜸 무슨 소설을 쓰시냐고 물어봅니다. 공포소설이라 대답하면 상대의 안색은 금세 평정을 잃습니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하고 많은 소설 중에 왜 하필 공포소설(따위)을 쓰냐?'고 묻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이렇게 대답할 작정입니다. '공포소설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바꿔주고 싶어서 공포소설을 쓴다'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을 준비했는데 어떻게 당신들이 19금을 때리냐'고 항변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다만 그 고매하신 간윤위 위원들의 심의가 그 얼마나 형평성 있는 결정이며, 그 얼마나 심사숙고한 결정이었는지 묻고 싶은 겁니다.

아마도 모종의 경로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에 대한 유해 간행물 신고가 접수되었을 테고, 간윤위 위원들은 소설을 휘리릭 훑어 보며 '간행물윤리' 기준에 어긋나는 대목만을 찾아내었을 겁니다. 마치 현역 부대에 서적 검열을 나온 검열관들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 대목들을 찾아낸 순간, 곧바로 청소년 유해간행물 선고를 내렸을 겁니다. 신속히 이루어진 재심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저는 궁금합니다. 대체 그 간행물 심의 기준이란 무슨 기준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며, 과연 객관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네들의 판단대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은 청소년에게 유해한 출판물일까요?

지금은 명곡으로 평가 받는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군부 독재 시절에는 시위대가 즐겨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금지곡이었습니다.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석권한 리차드 아텐보로의 <간디>도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는 장면이 과거 5.18 항쟁 등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7년간 수입이 보류되었습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뉴스만 틀어봐도 모방범죄를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극악무도한 사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며, 인터넷이나 P2P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청소년도 아무런 제약 없이 '유해'하기 이를 데 없는 영상 매체나 활자 매체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일례로 과거 이라크 인질 참수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시절, 강사로 근무했던 저에게 '선생님, 참수 동영상 노모로 보셨어요? 전 다운 받아 봤는데...'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던 중학생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기껏해야 작가의 상상력과 필력으로 구성된 허구인 텍스트 따위가 청소년에게 (간윤위가 우려하는) 어떤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온갖 자극적인 멀티미디어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이 과연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같은 책을 거들떠 보기나 할까요?

어차피 재심은 부결되었고, 간윤위가 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부터라도 그 고매하신 양반들께 부디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한국 공포 문학은 이제 막 첫 걸음마를 뗀 젖먹이에 불과합니다. 어렵사리 출간되는 국내 작가들의 공포소설은 대부분 초판을 넘기지 못하고 사장됩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은 이례적으로 인쇄 매체과 독자들을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초판을 모두 소화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청소년 유해도서가 된 마당에 재판은 출판시장에서 고전할(혹은 사장될) 가능성이 짙습니다. 결국 이번 간윤위의 결정은 젖먹이가 어깃장을 부릴 것 같이 생겼다고 목을 졸라 죽여 버리는 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말미에서 진 핵크만은 외칩니다. 그 외침을 그 분들께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무엇을 더 원합니까? 여기까지 올 동안 당신 도움 받은 적 없어요.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 얼마나 더 목숨이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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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김종일 | 2007/01/15 01:11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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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ozzyz review at 2007/01/16 16:29

제목 : 한국 공포문학, 이대로 주저앉나?
(보통 그 주에 잡지에 실린 기사는 인터넷에 올리지 않습니다. 1-2 주 묵힌,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기사이거나 같이 고민해보고 싶은 경우에만 블로그나 호러타임즈 등에 등록해왔어요. 하지만 이 기사는 개인적으로 이슈화시키고 싶은 주제라 일찌감치 여기 옮깁니다. &lt;한국공포문학단편선&gt;의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둘러싼 이야기에요. 딱히 어느 누구의 편을 들기 보다, 단순히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알게 되는......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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